[문화와 삶]예술하기 딱 좋은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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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6-13 08:14본문
올해 3월부터 한국문학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온라인 문학 플랫폼 ‘글틴’의 멘토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글틴 게시판에 자신이 쓴 글을 올리고 멘토 작가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수필과 비평문에 코멘트를 달고 매달 장원을 선정해 심사평을 쓴다. 매주 강의실에서 마주하는 학생들은 다 성인이기 때문에 사실상 청소년의 글을 이리 가까이서 읽는 것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내가 청소년이었던 시기가 있었음에도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니 마치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낯설다.
학교에서 또는 사회에서 여러 변화를 겪느라 바쁘고 힘들 텐데 꾸준히 글을 써서 올리는 이들이 있다. 나는 학창 시절에 그리 열렬히 글을 써본 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매번 감탄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감정과 감각을 나만의 문체로 남기려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한 마음을 전하고 격려하려 할 때면, 자꾸만 ‘대견’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는 어린 사람에게 주로 쓰는 말이 아닌가. 칭찬에 공연히 ‘어린 나이임에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것 같아서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체할 만한 다른 단어를 찾는다. 대단하다, 멋지다, 존경스럽다 정도면 충분하다. 대견하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청소년을 습관적으로 기특해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들이 어른보다 창작 활동을 이어 나가기 어려우리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그러던 중, 김지은 작가의 에세이집 <어린이는 멀리 간다>(창비, 2025)를 읽었다. 그는 스웨덴 도서전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한다. 당시 이명애 작가의 북토크에서 50대 노르웨이 여성 독자가 자신이 존경하는 환경운동가 페넬로페 레아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며 대신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페넬로페 레아는 열다섯 살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젊은 유니세프 대사였다고 한다.
김지은은 이 사례를 알게 된 후 “어린 친구가 참 대견하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그 마음 뒤에는 나이 서열주의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아동과 청소년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면 어른들은 기특하다고 칭찬”하지만, 그런 관점이 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청소년을 동등한 예술가로 보지 않고 어린 나이에도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장한’ 친구들 정도로 여긴 것 같다.
예술 앞에서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10대의 감성은 때론 어른의 것보다 깊이 있다. 두루 사랑받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도 그가 고등학생 때 창작한 시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라고 노래하는 그 시 말이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10대 시절이 가장 자기만의 감성이 첨예하게 깨어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씨에 애태우곤 하는, 손끝까지 심장이 옮겨온 듯 손에 닿는 온 하루가 두근대는 그런 때 말이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중2병’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그때도 10대의 감성을 낮잡아 보는 분위기는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지닌 감성 역시 시간 지나 부끄러워질 병증 정도로 가볍게 치부되었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부모님께 들키지 않으려 이불을 덮고 MP3로 밤새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는 에픽하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어른이 되면 좀 더 원숙한 감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어느덧 30대가 된 지금의 나는 10대 때 듣던 노래만 주야장천 듣는다. 그때 지녔던 감성은 유치한 것이 아니었고 여전히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다. 모든 나이가 예술하기 좋은 나이임을 깨닫는다.
나는 수필과 비평문에 코멘트를 달고 매달 장원을 선정해 심사평을 쓴다. 매주 강의실에서 마주하는 학생들은 다 성인이기 때문에 사실상 청소년의 글을 이리 가까이서 읽는 것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내가 청소년이었던 시기가 있었음에도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니 마치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낯설다.
학교에서 또는 사회에서 여러 변화를 겪느라 바쁘고 힘들 텐데 꾸준히 글을 써서 올리는 이들이 있다. 나는 학창 시절에 그리 열렬히 글을 써본 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매번 감탄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감정과 감각을 나만의 문체로 남기려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한 마음을 전하고 격려하려 할 때면, 자꾸만 ‘대견’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는 어린 사람에게 주로 쓰는 말이 아닌가. 칭찬에 공연히 ‘어린 나이임에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것 같아서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체할 만한 다른 단어를 찾는다. 대단하다, 멋지다, 존경스럽다 정도면 충분하다. 대견하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청소년을 습관적으로 기특해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들이 어른보다 창작 활동을 이어 나가기 어려우리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그러던 중, 김지은 작가의 에세이집 <어린이는 멀리 간다>(창비, 2025)를 읽었다. 그는 스웨덴 도서전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한다. 당시 이명애 작가의 북토크에서 50대 노르웨이 여성 독자가 자신이 존경하는 환경운동가 페넬로페 레아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며 대신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페넬로페 레아는 열다섯 살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젊은 유니세프 대사였다고 한다.
김지은은 이 사례를 알게 된 후 “어린 친구가 참 대견하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그 마음 뒤에는 나이 서열주의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아동과 청소년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면 어른들은 기특하다고 칭찬”하지만, 그런 관점이 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청소년을 동등한 예술가로 보지 않고 어린 나이에도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장한’ 친구들 정도로 여긴 것 같다.
예술 앞에서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10대의 감성은 때론 어른의 것보다 깊이 있다. 두루 사랑받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도 그가 고등학생 때 창작한 시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라고 노래하는 그 시 말이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10대 시절이 가장 자기만의 감성이 첨예하게 깨어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씨에 애태우곤 하는, 손끝까지 심장이 옮겨온 듯 손에 닿는 온 하루가 두근대는 그런 때 말이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중2병’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그때도 10대의 감성을 낮잡아 보는 분위기는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지닌 감성 역시 시간 지나 부끄러워질 병증 정도로 가볍게 치부되었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부모님께 들키지 않으려 이불을 덮고 MP3로 밤새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는 에픽하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어른이 되면 좀 더 원숙한 감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어느덧 30대가 된 지금의 나는 10대 때 듣던 노래만 주야장천 듣는다. 그때 지녔던 감성은 유치한 것이 아니었고 여전히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다. 모든 나이가 예술하기 좋은 나이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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