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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워드] ② 순살의 꿈 (Girls, Be on the ground!)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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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6-13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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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생 첫 러닝 대회에 나갔다. 여성만 신청 가능한 10㎞짜리 우먼스 런이었다. 달리기 시작 후 2㎞도 채 지나기 전, 그러니까 몸이 아직 달리는 상태에 적응하지 않아 힘들던 시점에 내 뒤쪽에 있던 한 참가자가 숨을 헐떡이며 저렇게 말했다. 정신줄 놓고 뛰는 와중에 저 말을 들으니 순간 웃음이 났다. 그의 말이 곧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시작 전 여기저기서 몸을 푸는 여성들을 보며 ‘여기서 내가 최약체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아마도) 나를 포함한 참가자들을 보며 ‘다들 XX 세군’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아닌가. 새삼 짧디짧은 운동 인생이 스쳐 지나가며 뿌듯함이 밀려왔다.
학창 시절 내 별명은 ‘할머니’였다. 자타공인 저질 체력이 바로 나였다. 그 시절 친구들과 자습 시간 주고받은 쪽지를 보면 ‘할멈’으로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다. 책 좋아하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성장 과정에서 신체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도복 입고 ‘악악’ 소리 지르는 게 싫어 태권도장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옆구르기를 하기 싫어 쭈뼛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운동하다 보면 옷이 들리고 뒤집히는 일이 불가피하게 생기는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남들 앞에서 내 몸을 움직이는 것, 살갗이 드러나는 데에도 예민해졌다.
돌이켜 보면 여자애들은 거의 나와 비슷했다. 내가 다닌 여중·여고는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운동하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 시절 우리는 살 탄다고, 다리 굵어진다고, 땀 난다고 운동을 싫어했다. 체육 시간에는 시원한 스탠드가 늘 인기였다. 그나마도 나는 눕는 것을 선호했다. 체력장을 하는 날 정도가 옆구리가 아플 정도로 뛰어보는 몇 안 되는 날이었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 제일 자주 했던 공놀이는 피구였는데, 이 피구 때문에 구기 종목에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또래 여성도 주변에 많다. 피구는 사람을 겨냥해 공을 던져 맞추고, 살아남으려면 날아오는 공을 피해야 하는 규칙이다. ‘최후의 1인’이 되지 않는 이상 한 번은 공을 맞게 돼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람을 금 안에 가둬놓고 공으로 패는 게임인 것이다. 물론 공을 제어하는 능력과 팀워크를 기른다는 효과도 있었겠지만, 공에 맞고 우는 친구가 꼭 나왔다.
이렇듯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기까지 내 머릿속엔 ‘운동하는 여자’의 상이 없었다. 여자가 공을 차고, 마라톤 풀코스를 뛰고,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내게 낯설지 않아진 건 비교적 최근이다. 아마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관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21년 6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4년 전이다. 당시 나는 목~어깨 부위를 건드리는 수술을 겪은 상태였는데, 수술 후 무기력하게 누워서 시간을 보낸 탓에 원래 없던 근육이 더 빠지고 어깨는 더 말려버렸다. 어느 날 속이 울렁거리고 팔이 저려 병원에 가보니 목디스크라는 진단을 받았다. 체감하는 증상으로 봤을 땐 허리디스크도 위태위태했다. 그러면서도 운동은 생각조차 못 하고 한동안 병원 치료와 마사지로 연명하다가,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도수치료사의 권유에 따라 필라테스를 시작한 게 4년 전이다.
필라테스 PT(퍼스널 트레이닝) 선생님은 나를 보고 “갓 태어난 아기 같다”고 했다. 귀엽다는 뜻이 아니라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는 몸 상태라는 의미였다. 그 정도로 나는 골격근량이 처참했던 ‘순살’이었다. 그 순살을 굴리고 펴주며 올바른 몸의 형태로 빚어나가는 작업을 2년 넘게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원래 운동을 안 했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운동을 시작했다. 직장인으로서 ‘생존형’ 운동에 맞닥뜨렸던 시점이 저마다 달랐을 뿐, 그 시기는 반드시 찾아왔다.
안 하던 운동을 시작하며 느꼈던 감정 중 하나는 억울함이었다. 필라테스를 하면서 목이 더 잘 돌아가고 어깨와 허리도 나아지는 걸 실감하면서 ‘왜 이전엔 운동하지 않았을까’ 하며 과거의 나를 원망했다. 워낙 아무것도 없었던 몸이었기에 운동하는 만큼 효과가 났고, 재미가 붙어 점차 헬스, 크로스핏, 자전거로 다양하게 종목을 넓혔다.
지극히 개인적인 ‘순살 탈출기’를 길게 서술한 건 이 이야기에 공감할 여성이 많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운동과 스포츠를 비롯한 신체 활동은 사실 젠더화돼있다. 사회가 여성과 남성의 신체에 각각 기대하는(강요하는) 바가 다르고, 개인이 이를 해석하고 수행하는 방식 역시 성별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여성 청소년이 신체 활동에 소극적인 현상을 다룬 연구도 많다. 논문 ‘여자 청소년 체육·스포츠를 위한 젠더이론적 접근(2010)’은 “전통적으로 스포츠 현장에서 남성들은 거칠고 강하다는 이미지와 연관돼왔고, 반면 여성들은 수동적이며 순하고 연약하다는 이미지가 사회에서는 더 인정받아왔다”며 “일반적인 성차에 대한 시각이 남녀가 스포츠하는 윤리적 선호도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남자애들이 격렬하게 움직이며 땀 흘리는 모습은 ‘뿌듯하게’ 보면서 여자애가 뛰어놀면 질책하는 식의 편견, 부모들부터가 아동을 성별에 따라 다른 활동으로 이끄는 경향, 운동하는 모습이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인인지 등이 모두 “여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고 남학생들에게 운동장 독점의 권리를 넘겨주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성별에 따라 수행하는 운동 종목과 운동 장소에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논문 ‘청소년의 성별에 따른 규칙적 체육활동 참여의 차이(2024)’를 보면 구기 및 라켓 스포츠에 참여하는 비율은 남성 청소년(69.9%)이 여성 청소년(32.3%)보다 훨씬 높았다. 체력 단련 및 생활 운동은 여성 청소년(61.8%)이 남성 청소년(18.3%)보다 높았다. 여성 청소년은 공공체육시설(21.9%)과 자가 및 기타체육시설(16.3%)을 남성 청소년보다 높은 비율로 이용한 반면, 남성 청소년은 학교체육시설(62.6%)을 여성 청소년보다 더 높은 비율로 이용했다. 고강도 체육 활동에 참여하는 비율도 남성 청소년(49.2%)이 여성 청소년(27.1%)보다 훨씬 높았다.
흔히 성차별과 불평등을 ‘기울어진 운동장’에 비유한다. 상징적 차원이 아닌 물리적 운동장을 말하자면, 그 운동장에 여성들이 애초에 별로 서 있지도 않은 모양새다. 다음 세대는 좀 나아졌으리란 기대가 무색하게 여성 청소년이 몸을 덜 움직이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한강에 나가보면 남자애들은 삼삼오오 자전거를 타거나 공놀이를 하는데 그 또래 여자애들은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얘들아 어디서 뭐 하니, 먼저 몸을 버린 아줌마가 이렇게 당부한다’라는 외침을 속으로 삼킨다.
한창 운동 의욕이 불타오르다가도 가끔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다. 집밖에서 운동할 땐 사람이 많아도 무섭고 사람이 너무 없어도 무섭다. 이 두려움에는 근거가 있다. 혼자 자전거를 타는 여성에게 바짝 접근해 불쾌감과 공포감을 조성하는 남성 라이더의 영상을 최근 유튜브에서 봤다. ‘여자 뒤만 따라다니는 변태 라이더 실화’란 영상을 보면 그 남성은 한강 자전거길에 주로 출몰하는데, 자기가 주행하던 방향을 틀면서까지 여성 라이더를 따라가고 뒤꽁무니에 가까이 붙는다. 여성 라이더가 멈추면 따라 멈추고, 달리면 들러붙는 식이다. 라이더 간 통용되는 안전거리 내지는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해 상대에게 불쾌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는 성추행으로 볼 정도의 신체적·성적 접촉은 아니다. 그가 성희롱 발언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문제다. 당하는 처지에선 소름이 끼치지만 ‘이걸 신고해도 되나’, ‘어떻게 벗어나지’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댓글을 봐도 대응 방법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하다. 괜히 상대해서 더 자극하지 말고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인 것 같은데, 문제는 ‘어떻게’다. 한강에서 솔로 라이딩을 즐기는 여성 당사자로서 끝까지 보기가 무서운 영상이었다. 같이 본 친구는 “넘어지는 척 바퀴를 걷어차라”고 했지만 그것이 최선인지,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우먼스 런에도 남성으로 보이는 자가 일명 ‘뻐꾸기’로 뛰었다는 정황이 있다. ‘뻐꾸기’는 대회에 정식으로 참가하지 않고 코스에 끼어서 뛰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다. 기사 속 사진으로 박제된 그 사람은 배번도 없었으니 일단 뻐꾸기였음은 자명하다. 더 나아가 (외모로 성별을 추정하게 돼 유감이지만) 그가 실제 남성이라면 여성들만 뛸 수 있는 대회에 왜 왔는지 의문이 든다. 여성 참가자로서 말하자면 여자들만 있어야 할 곳에 굳이 끼어든 남성이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하다.
한강 변태 라이더와 뻐꾸기남은 그 정신의 심연이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다. 저리 가라고 소리 질렀다가, 레이스에서 빠지라고 지적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 공포의 핵심이다. 여성의 ‘안전한 공간’에 침입하는 행위 자체가 물리적 위협임은 물론이고 말이다.
이처럼 여성의 운동 경험은 주의와 걱정으로 뒤덮여 있다. 산에는 혼자 가지 마라, 자전거 탈 때 가까이 붙는 남성 라이더를 피해라, 산책할 때 너무 한적한 길은 가지 마라, 사람 많을 때 다녀라, 밤에 나가지 마라…. 종아리 알 생긴다, 어깨 벌어진다, 팔뚝 굵어진다 등 외관의 변화(?)를 우려하는 여성들도 여전히 많다.
그래서 <골때리는 그녀들(SBS)>, <무쇠소녀단(tvN)> , <강철부대W(채널A)>, <오늘부터 운동뚱> 등 운동에 도전하는 여성을 다룬 프로그램이 반갑다. 운동 수행 주체만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꿔도 프로그램이 신선해진다는 건 그만큼 ‘운동하는 여성상’이 우리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조명된 적이 드물었다는 뜻이다. 여성 신체의 겉모습보다 기능에, 땀의 더러움보다 보람에 주목하는 매체와 창작물이 많아질수록 신체 활동에서의 젠더 격차도 줄어들지 않을까.
지난 4년을 돌아보면 세상은 내 체력만큼 넓어졌다. 이제는 여행을 가도 현지에서 할 수 있는 트레킹, 등산, 자전거 타기 같은 활동을 찾아본다. 한번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키나발루산 자락을 오르는 현지 투어에 갔는데, 중도 포기하고 내려온 일행이 완주한 내게 ‘너 체력 좋다(You are fit)’고 칭찬을 건넸다. ‘몸이 쓸만하다’는 취지의 칭찬을 들은 건 생전 처음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자전거를 대여해 온종일 시티 라이딩을 즐겼고, 한국에서도 친구들과 몇 차례 등산을 했다.
요즘은 크로스핏과 하이록스 프로그램이 있는 여성 전용 체육관에 간간이 나가며 체력을 보충하고 있다. 바벨을 활용하는 동작은 여전히 어색하고 어렵지만 손에 잡히는 굳은살이 뭔가 듬직하다. 내 체력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확인해 보는 시험대였던 10㎞ 런은 무난히 완주에 성공했다. 20년 전 할멈, 4년 전 순살 시절과 비교하면 크나큰 발전이다. 다음 목표는 자전거로 전국의 자전거길을 달리고, 좋은 계절에 설악산에 오르는 것이다. 구기종목도 하나쯤 배워보고 싶다.
여전히 생존형 운동이지만, 오늘도 운동 가기 싫지만, 안 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운동장에 선 여성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듯 나도 누군가의 용기가 될 날이 오길. 여전히 말리고 꼬인 몸일지라도 근육을 붙이고 고치면서 키워나가려고 한다. 아직 두 발로 가보지 못한 세상을 꿈꾸며. Girls, be on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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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10년 뒤, 여자가 결혼에 안달하는 날이 옵니다.”“나이 먹어봐라. 바로 후회한다.”‘ 비혼 여자의 미래’를 검색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반응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겉으론 행복하더라도 속으론 불안하며, 말년엔 결국 후회하리란 공격은 무척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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