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서리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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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6-13 22:57본문
여름이면 봉선화를 따다가 손톱에 꽃물을 들인다. 그 자체로 재미도 있지만 꾸미는 데 서툴러 그런지 홀로 겸연쩍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때 손을 내밀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꽃단장이지” 하고 으스대기에도 그만이랄까. 손끝에 남은 꽃물이 시간을 가늠케 해 보통날에 잠시 여유를 갖게 하는 것도, 그렇게 어깨가 움츠러드는 계절에 이르러 은은히 사라지는 것도 맘에 든다.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계절 풍습이다.
여름 공기가 감지될 무렵 내 걸음이 느릿해지는 건 봉선화를 찾아 술래잡기하듯 두리번거리느라 그렇다. 천변이나 동네 자투리땅에 피었던 것이 생각나 부러 찾아가 보기도 하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도심에서 봉선화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해엔 가을볕이 따가워질 즈음 나주의 한 농가에서 가까스로 봉선화 한 줌을 얻었다.
아직 시도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최후의 보루가 있긴 하다. 집에서 걸어 3분 거리의 어린이집. 신록이 짙어가는 이맘때는 아이들이 텃밭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다. 상추, 가지, 토마토 등의 작물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봉선화. 먹지 못하는 종류로는 봉선화가 유일하다시피 한데 수많은 꽃 가운데 봉선화를 심는 건 아이들에게 오랜 여름의 감각과 추억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봉선화를 구하기 어려운 계절에 내 손톱 끝에 남은 꽃물을 본 어린 조카가 저도 해보고 싶다고 애교를 부렸다. 생활용품점에서 ‘봉숭아빛 물들이기’라고 가루 형태로 파는 것이 있대서 한 봉지 사다가 흉내를 낼 수 있었는데, “이 간편함도 추억으로 쌓일 수 있을까?” 하며 어린 조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넋두리를 뱉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서 따뜻한 물로 손을 씻으니 꽃물이 금방 지워졌다. 봉선화 꽃물도 인스턴트가 가능해진 시대, 잠깐이라도 재밌었으면 됐다고 서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멋쩍은 추억까지 더해 매년 오며 가며 푸릇해지는 어린이집 텃밭을 구경하게 되는데, 문제는 봉선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강력한 서리 충동이 밀려온다는 점이다. ‘몇 송이만 있으면 되는데…’ ‘티도 안 날 텐데…’ 하는 마음이 손대면 톡 하고 터질 듯한 봉선화 씨앗처럼 톡톡 터져 나온다.
몇해 전 시골 오일장에서 봉선화 씨앗을 발견하고 냉큼 값을 치른 건 고사리손으로 기른 꽃잎을 차마 서리할 수가 없어서였다. 단돈 1000원, 한 봉지에 500립이나 들어 있다니 이제 평생 봉선화 걱정 안 해도 되겠다며 헤벌쭉. 막상 집에 와서는 허둥댔다. 꽃씨를 어떻게 심어 길러야 할지 전혀 감이 없었다.
검색해보니 씨앗을 물에 불려 뿌리가 껍질을 깨고 나올 즈음 화분에 옮겨 심는 게 좋단다. 낯 모를 디지털 이웃들의 가르침대로 하자 싹은 금방 머리를 내밀었다. 내가 바라본다 해서 더 빨리 자라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고 기특한 마음에 내 시선은 내내 그 작은 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랄 만한 속도로 키가 솟던 봉선화 줄기가 며칠 지나지 않아 폭 고꾸라졌다. 화분이 작아 뿌리가 뻗질 못해 그런가 싶어 큰 화분에다 다시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뭐가 문제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한데 야속하게도 어린이집 봉선화는 보기 좋게 흐드러졌다. 어찌나 심술이 나던지.
얼마 전 챗GPT의 힘을 빌려 봉선화는 햇빛을 아주 좋아하는 양지 식물이라 하루 4시간 이상 꼬박 직사광선을 쬐어 주어야 한다는 것, 집 안에서 키만 길쭉하게 자라다 쓰러지는 건 빛을 찾아 위로만 자라다 줄기가 약해져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 그즈음 어린이집 앞을 지나며 올해도 변함없이 텃밭 상자에 새싹이 돋는 걸 보게 됐다.
호기롭게 다시 씨를 뿌렸다. 이번에는 건물 밖 해가 잘 드는 벽면 아래에 내놓고 하루 한 번씩 물을 주는데, 세상에, 이제는 어린이집 텃밭에 흑심을 품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요즘 매일같이 나 홀로 아이들과 경쟁 중이다.
봉선화 꽃망울이 터질 때쯤 화분을 골목 오가는 이웃들 눈에 잘 띄는 위치로 옮겨볼 생각이다. 누군가 서리를 해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공지능에 기대 식물을 생장시킨 이 경험은 내 여름에 또 어떤 추억이 될까?
여름 공기가 감지될 무렵 내 걸음이 느릿해지는 건 봉선화를 찾아 술래잡기하듯 두리번거리느라 그렇다. 천변이나 동네 자투리땅에 피었던 것이 생각나 부러 찾아가 보기도 하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도심에서 봉선화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해엔 가을볕이 따가워질 즈음 나주의 한 농가에서 가까스로 봉선화 한 줌을 얻었다.
아직 시도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최후의 보루가 있긴 하다. 집에서 걸어 3분 거리의 어린이집. 신록이 짙어가는 이맘때는 아이들이 텃밭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다. 상추, 가지, 토마토 등의 작물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봉선화. 먹지 못하는 종류로는 봉선화가 유일하다시피 한데 수많은 꽃 가운데 봉선화를 심는 건 아이들에게 오랜 여름의 감각과 추억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봉선화를 구하기 어려운 계절에 내 손톱 끝에 남은 꽃물을 본 어린 조카가 저도 해보고 싶다고 애교를 부렸다. 생활용품점에서 ‘봉숭아빛 물들이기’라고 가루 형태로 파는 것이 있대서 한 봉지 사다가 흉내를 낼 수 있었는데, “이 간편함도 추억으로 쌓일 수 있을까?” 하며 어린 조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넋두리를 뱉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서 따뜻한 물로 손을 씻으니 꽃물이 금방 지워졌다. 봉선화 꽃물도 인스턴트가 가능해진 시대, 잠깐이라도 재밌었으면 됐다고 서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멋쩍은 추억까지 더해 매년 오며 가며 푸릇해지는 어린이집 텃밭을 구경하게 되는데, 문제는 봉선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강력한 서리 충동이 밀려온다는 점이다. ‘몇 송이만 있으면 되는데…’ ‘티도 안 날 텐데…’ 하는 마음이 손대면 톡 하고 터질 듯한 봉선화 씨앗처럼 톡톡 터져 나온다.
몇해 전 시골 오일장에서 봉선화 씨앗을 발견하고 냉큼 값을 치른 건 고사리손으로 기른 꽃잎을 차마 서리할 수가 없어서였다. 단돈 1000원, 한 봉지에 500립이나 들어 있다니 이제 평생 봉선화 걱정 안 해도 되겠다며 헤벌쭉. 막상 집에 와서는 허둥댔다. 꽃씨를 어떻게 심어 길러야 할지 전혀 감이 없었다.
검색해보니 씨앗을 물에 불려 뿌리가 껍질을 깨고 나올 즈음 화분에 옮겨 심는 게 좋단다. 낯 모를 디지털 이웃들의 가르침대로 하자 싹은 금방 머리를 내밀었다. 내가 바라본다 해서 더 빨리 자라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고 기특한 마음에 내 시선은 내내 그 작은 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랄 만한 속도로 키가 솟던 봉선화 줄기가 며칠 지나지 않아 폭 고꾸라졌다. 화분이 작아 뿌리가 뻗질 못해 그런가 싶어 큰 화분에다 다시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뭐가 문제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한데 야속하게도 어린이집 봉선화는 보기 좋게 흐드러졌다. 어찌나 심술이 나던지.
얼마 전 챗GPT의 힘을 빌려 봉선화는 햇빛을 아주 좋아하는 양지 식물이라 하루 4시간 이상 꼬박 직사광선을 쬐어 주어야 한다는 것, 집 안에서 키만 길쭉하게 자라다 쓰러지는 건 빛을 찾아 위로만 자라다 줄기가 약해져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 그즈음 어린이집 앞을 지나며 올해도 변함없이 텃밭 상자에 새싹이 돋는 걸 보게 됐다.
호기롭게 다시 씨를 뿌렸다. 이번에는 건물 밖 해가 잘 드는 벽면 아래에 내놓고 하루 한 번씩 물을 주는데, 세상에, 이제는 어린이집 텃밭에 흑심을 품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요즘 매일같이 나 홀로 아이들과 경쟁 중이다.
봉선화 꽃망울이 터질 때쯤 화분을 골목 오가는 이웃들 눈에 잘 띄는 위치로 옮겨볼 생각이다. 누군가 서리를 해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공지능에 기대 식물을 생장시킨 이 경험은 내 여름에 또 어떤 추억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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